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중동 국가들의 갈등을 지켜보며 저는 종종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저 사막의 국경선은 언제, 누가, 왜 저렇게 반듯한 직선으로 그어놓았을까?"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2년 작 명불허전 서사시 <로렌스 오브 아라비아(Lawrence of Arabia)>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뼈아프고도 웅장한 해답을 쥐고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아름다운 영상미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아랍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철저히 이용하고 배신했던 서구 제국주의의 탐욕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영국 장교 T.E. 로렌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현대 중동 분쟁의 근원이 된 역사적 팩트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제1차 세계대전의 체스판이 된 중동 사막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독일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을 견제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중동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영국은 이들을 내부에서 붕괴시키기 위한 전략을 짭니다.
그 전략의 핵심이 바로 '아랍 민족주의의 자극'이었습니다. 영국은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던 아랍 부족들에게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 전쟁이 끝난 후 너희들만의 통일된 독립 국가(대아랍 왕국)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이 담긴 역사적 문서가 바로 1915년의 '맥마흔-후세인 서한'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T.E. 로렌스(피터 오툴 분)는 이 약속을 믿고 아랍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오스만 제국과 피 흘리며 싸우는 연락 장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영국은 철저히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아랍인들의 피를 '용병'처럼 이용했던 것입니다.
2. 경계에 선 자의 딜레마: 로렌스의 심리적 붕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인문학적 포인트는 로렌스라는 인물이 겪는 지독한 내면의 갈등입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장교로서 영국군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야 했지만, 사막에서 아랍 부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점차 그들의 문화와 독립 열망에 깊이 동화되어 갑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로렌스가 아랍 전통 의상을 입고 부족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겉보기엔 낭만적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소속감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영국 사령부는 처음부터 아랍에게 독립국을 지어줄 생각이 없었음을 로렌스는 점차 깨닫게 됩니다. 조국의 기만적인 제국주의 정책과 자신이 피를 나눈 아랍 동지들을 향한 부채감 사이에서 그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이는 타국의 운명을 장기판의 말처럼 여기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이, 비단 식민지인들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의 최전선에서 양심을 지키려던 개인의 내면마저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줍니다.
3. 세계사 최악의 이면 계약: 사이크스-피코 협정
제가 이 역사적 사건을 다루며 가장 분노하는 대목은 영국이 벌인 이른바 '3중 사기극'입니다. 앞서 아랍에게 독립을 약속(맥마흔 서한)했던 영국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에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리에 또 다른 조약을 맺습니다. 바로 중동의 지도를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분할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갖기로 한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유대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벨푸어 선언'까지 발표합니다. 하나의 땅을 두고 아랍인, 유대인, 그리고 프랑스와 자신들에게 각각 3중으로 이중 계약을 남발한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 치열한 전투 끝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아랍인들이 축배를 들기도 전에,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이 탁자에 지도를 펼쳐 놓고 영토를 분할하는 장면은 짐승보다 못한 외교의 민낯을 고발합니다.
4. 자로 그은 직선 국경선이 부른 영원한 유혈 사태
아랍의 독립이라는 로렌스의 낭만적인 꿈은 결국 영국의 배신과 정치적 타협 앞에서 산산조각 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구 열강은 아랍 부족들의 수백 년 된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자신들의 석유 이권과 편의에 따라 사막에 '직선 국경선'을 그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이 겪고 있는 끔찍한 내전과 종파 갈등(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족 문제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민족의 경계를 무시하고 서구 열강이 억지로 꿰어 맞춘 이 인위적인 국경선에서 출발합니다. <로렌스 오브 아라비아>는 과거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오만함과 무책임한 외교가 수천만 명의 운명을 어떻게 수백 년의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현대 중동사의 뼈아픈 프리퀄(Prequel)입니다.